014 Au hasard Balthazar 당나귀 발타자르 (1966) 로저 에버튼의 위대한 영화 200

Au hasard Balthazar (1966)


감독 : Robert Bresson
출연 : 
Anne Wiazemsky ...  Marie
François Lafarge ...  Gerard
Philippe Asselin ...  Marie's father
제작 1966년 / 95분 / 프랑스

로베르 브레송Robert Bresson은 영화계의 성인聖人중 한 사람이다. 그리고 <당나귀 발타자르>(1966)는 그가 올리는 가장 가슴 절절한 기도다. 영화는 당나귀의 일생을 탄생부터 죽음까지 따라가면서, 그 내내 당나귀 본연의 존재-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력을 조금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고결하게 수긍하는 말 없는 짐승-에 깃든 위엄을 당나귀에게 부여한다. 발타자르는 만화에 흔히 등장하는 말하고 노래할 수 있는 동물이 아니라, 네 발 달린 인간이다. 발타자르는 당나귀다. 그리고 영화는 그 사실만큼이나 소박하다.
우리가 처음보는 발타자르는 불안한 첫 걸음을 떼는 갓 태어난 당나귀다. 영화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세 아이가 당나귀의 머리에 물을 뿌려 세례를 준다. 브레송이 주장하고자하는 바는 교회는 인간만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가르치지만, 하나님의 곁에는 그분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을 위한 자리가 있는게 분명하다는 것인 듯하다.

발타자르는 초년의 삶을 영화의 전체적인 배경인 프랑스 농촌마을의 농장에서 보낸다. 지역 주민중 많은 사람이 당나귀의 주인이 될 것이고, 당나귀는 그중 일부에게 한 차례 이상 돌아갈 것이다. 그중 몇 명은 좋은 사람드이지만, 대부분 결함이 있다. 다른 범죄들을 저지르는 동네의 주정뱅이가 동물에게만큼은 잔혹한 짓을 하거나 경솔한 짓을 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발타자르의 첫 주인은 당나귀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마리(안느 비아젬스키)다. 그녀의 아버지는 선생님이고, 소꿉친구인 자크(월터 그린)는 훗날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말한다. 자크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비탄에 잠긴 그의 아버지는 이 고장을 떠나면서 농장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인 마리의 아버지(필리페 아슬랭)에게 위탁한다. 발타자르를 사랑하는 마리는 들꽃으로 발타자르의 재갈을 장식하는 것을 즐긴다. 그러나 마을 청년들이 당나귀를 못살게 굴 때, 그녀가 당나귀를 보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이 패거리의 우두머리는 제라르(프랑수아 라파쥬)다. 미사 도중에 제라르가 노래를 부를때 마리가 성가대를 올려다보자, 그는 성스러운 말씀에조차도 사악한 기운을 불어넣는다.

마리의 아버지는 교만이라는 죄의 희생자다. 그가 철두철미한 정직함으로 농장을 관리함에도, 시기심 많은 이웃은 그가 농장 주인의 재산을 도둑질하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린다. 그런데도 그는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회계장부나 영수증을 내놓기를 거부한다. 그의 고집이 집안의 파탄으로 곧장 이어지면서, 마리의 어머니(나탈리 조이오트)는 절망한다. 발타자르는 지역 제빵업자의 재산이 되고, 제빵업자의 아들(다름 아닌 제라르)은 빵 배달에 발타자르를 이용한다. 제라르는 발타자르를 학대하고 혹사한다. 발타자르는 결국 움직이기를 거부한다. 제라르는 발타자르의 꼬리에 신문지를 묶고는 불을 놓는 것으로 응수한다. 결국 제라르의 학대 아래 발타자르는 쓰러지고, 발타자르를 죽이자는 얘기가 오간다.

그러나 마을의 술꾼 아널드(장 클로드 길베르)는 당나귀를 구해내서 활력을 되찾게 해주고, 발타자르는 서커스 동물-곱셈을 할 줄 아는 '계산하는 당나귀'-로 선택받으면서 짧은 영광의 순간을 누린다. 얼마 안 있어 발타자르가 은둔자의 재산이 되면서 이 삶은 끝나고, 결국 발타자르는 처음에 태어났던 마구간으로 되돌아온다. 발타자르는 거기에서 마리의 아버지뿐 아니라 마리와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감상적인 엔딩이 아니다. 마리는 연약한 아가씨다. 참된 자크가 다 큰 청년이 돼 돌아와서 아직도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하자, 그녀는 그를 거부한다. 그녀를 못되게 대하지만 가죽재킷을 입고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멋있어 보이는 제라르를 그녀는 더 좋아한다. 우리가 발타자르의 눈을 통해 보는 것은 왜소하고 결점이 있으며 연약한 사람들로 가득한 마을, 친절함은 보기 드물고 잔혹함은 쉽게 등장하는 세상이다. 그것이 우리가 보는 것이다. 그런데 발타자르가 보는 것은 무엇인가? 브레송의 접근 방식의 천재성은 발타자르의 '반응 숏'이라고 묘사될 법한 순간을 결코 단 한 순간도 우리에게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른 영화에 등장하는 동물들은 눈동자를 굴리거나 발을 구르거나 하지만, 발타자르는 그저 어슬렁거리거나 기다린다. 그러면서 자신이 짐을 나르는 동물이라는 것을 아는, 그리고 자신의 삶은 짐을 지는 것과 지지 않는 것, 고통스러운 느낌과 그렇지 않은 느낌, 심지어는 즐거운 느낌으로 구성돼 있다는 것을 아는 당나귀의 명확한 시선으로 만사를 판단한다. 이 모든 것은 한결같이 그의 통제권을 벗어나 있다.

그런데 영화에는 발타자르의 울음소리가 들어있다. 물론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다. 그냥 당나귀가 낼 수 있는 소리다. 어떤 이들은 발타자르의 울음소리를 귀에 거슬리는 투덜거림으로 듣겠지만, 내가 듣기에 그 소리는 세상에서 딱 한 가지 소리만을 부여받은, 그리고 그 소리를 내면서 만족감을 느끼는 짐승의 소리처럼 들린다. 발타자르가 특별한 사건들에 반응하면서 그런 소리를 내는게 결코 아니라는 점을 주목해야만 한다. 그런 식의 반응을 보였다면 발타자르는 만화에 나오는 동물들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당나귀에게는 자신의 생각을 드러낼 방도가 전혀 없지만, 그렇다는 사실이 우리가 그의 생각을 추측하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흰점이 박힌 이 털북숭이 얼굴과 그 커다란 눈망울을 우리는 호감을 갖고 대하면서, 당나귀가 겪는 모든 경험에 공감한다. 브레송이 자신의 작품들 대부분에서 의도했던 계몽적인, 심지어는 숭고하기까지 한 창작 의도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캐릭터들이 우리를 향해 다가오게끔 수동적인 자세를 취하는 대신, 우리가 직접 캐릭터들을 향해 다가가야만 한다. 너무나 많은 영화가 만사를 관객을 위해 완성해놓는다. 우리는 웃거나 울라는 신호를 받으며, 두려워하거나 안도감을 느끼라는 지시를 받는다. 히치콕은 영화를 관객의 내면에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기계라고 불렀다. 브레송(그리고 오즈)은 다른 접근 방식을 취한다. 그들은 캐릭터들을 존중하고, 우리에게도 자신들과 함께 그들을 존중해달라고, 그리고 우리 자신의 결말이기도 한 캐릭터들의 결말에 당도해달라고 요청한다. 이것은 감정이입이 필요한 영화다. 오즈와 브레송 모두 관객의 감정에 지시하는 일을 피하기 위해 스타일 면에서 엄격한 한계들을 설정했다는 점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오즈는 그가 만든 유성영화들에서는 카메라를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모든 숏은 구도를 잡은 채로 그 상태를 유지했고, 캐릭터들이 장면에 등장하기 전에 장면을 시작했다가 그들이 장면을 떠난 후에도 장면을 지속시킨 경우가 잦았다.

브레송이 설정한 가장 흥미로운 한계는 출연한 배우들에게 연기를 못 하게끔 금지한 것이다. 그는 동일한 숏을 열 번, 스무 번, 심지어는 쉰 번씩 촬영한 것으로 유명하다. 모든 '연기'가 빠져나가면서 연기자들이 구체적인 행동을 취하거나 대사들을 내뱉은 꾸밈없는 수준이 될 때까지 말이다. 그의 영화에는 드 니로나 펜 같은 배우들을 위한 공간이 없다. 그렇게 하면 좀비들이 그득한 영화가 나올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 결과는 정반대다. 억양 변화나 스타일을 허용하지 않고 행위나 대사를 간결하게 연기시키는 것을 통해, 브레송은 그의 영화들을 두드러지게 감정적으로 만드는 일종의 순수를 이뤄냈다. 배우들은 우리가 그들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가져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일 없이 자신들의 삶을 묘사한다. 어떤 느낌을 받아야 하는지를 억지로 결정하고 억지로 감정이입해온 우리는 배우들이 우리들을 위해 그런 감정을 제공했을 때보다도 더 강렬한 감정을 자주 느낀다.

이런 영화 철학 아래에서, 당나귀는 브레송 영화의 완벽한 캐릭터가 된다. 발타자르는 자신의 감정을 우리에게 전달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그가 육체로 보여주는 느낌들은 보편적인 관점에서만 우리에게 전달된다. 눈에 덮이면 그는 춥다. 꼬리에 불이 붙으면 그는 겁에 질린다. 저녁을 먹으면 그는 든든하다. 과로하면 그는 피곤하다. 집에 돌아오면 친숙한 장소에 왔다는 생각에 안도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따뜻하게 대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를 괴롭히지만, 인간들의 행동 동기는 그의 이해 수준을 넘어선 곳에 있고, 당나귀는 으레 그래야만 하기 때문에 인간들이 하는 행동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자, 다음은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브레송은 우리 모두는 발타자르들이라고 암시한다. 우리가 품은 꿈과 소망과 최고의 계획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우리를 데리고 결국은 뭐가 됐건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한다. 생각하고 추론할 수 있는 능력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세상 돌아가는 방식을 이해하고 해결책을 찾아내며 해답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지능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우리의 숙명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뿐, 숙명에 대한 통제력은 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브레송은 우리는 빈손으로 남겨놓지 않는다. 그는 감정을 이입하라고 우리에게 권한다. 우리가 마음을 열어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에 공감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인간적인 경험을 홀로이 견뎌내면서 느끼는 고독 대신, 그 경험을 공유하는 데에서 위안을 찾을 수 있다.

<당나귀 발타자르>의 마지막 장면은 그 주장을 아주 아름다운 방식으로 펼친다. 늙어서 세상을 떠날 날이 가까워진 당나귀는 양떼 속을-정말이지, 그런 무리 속에서 삶을 시작했던 것처럼-헤매고 다닌다. 다른 짐승들이 오고가면서 때로는 당나귀에게 코를 문질러대고, 어떤 것들은 당나귀의 존재를 거의 알아차리지 못하며, 어떤 것들은 이 짐승 친구를 받아들여 풀밭과 햇별을 함께 나눈다. 양들이 자기들 할 일을 계속 해나가는 동안, 발타자르는 엎드려서 결국 세상을 떠난다. 당나귀는 다른 피조물들이 그가 할 일을 해야하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곳을 마침내 찾아냈다.
- Roger Ebert [The Great Movies 2]


덧글

  • ahaskwys 2010/03/22 20:40 # 삭제 답글

    오늘 이비에스에서 방영하여 시간상의 문제로 보다 말았는데 인터넷
    검색상 가장 흡족하여 퍼갑니다.

    좋은하루 되시고 기쁨이 만연하시길 기원합니다.

  • ^^ 2010/08/10 12:41 # 삭제 답글

    보고나서도 느낌은 좋았지만 잘 이해가 안가고 익숙지 않은 연출이었는데..

    님의 감상을 읽고 그 영화를 이해하는데에 많은 도움이됐습니다.^^

    멋진영화였군요. 자세히 못본게 아쉽습니다.
    감상문은 제 블로그에 비공개로 감사히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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